부유하는 패션

패션은 부유한다. 옷 자체로는 딱히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티셔츠와 스웨트 위 문구가 늘어난 건 디자인으로만 전달하는 의미가 해석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글자가 범람하는 시대에 그런 모호함은 세상 모호함의 총량만 늘릴 뿐이다. 직접적이지 않으면 엉뚱하게 해석하고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다. SNS 시대의 엉뚱한 목소리 들은 상당히 힘이 크다.

어쨌든 여기에는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전의 트렌드와 이후의 트렌드 사이에 논리적 인과 관계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반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받아들이는 게 낫다. 목표가 없는 어딘가로 질주하고 그 질주로 돈을 번다. 그러므로 이런 변화에 대해 논리와 인과를 애써 가져다 대려는 시도는 헛된 노력이 된다. 

슬림핏 다음에 오버사이즈 트렌드가 온 건 그냥 사람들이 슬림한 옷에 질렸기 때문이다. 룩북에 실려 있어도 와 닿는 게 없다. 약간 더 복잡한 관련성을 댈 수는 있다. 예컨대 실용성과 편리함에 중독된 현대인들이 답답한 슬림핏에 질렸다. 옳은 부분이 있지만 다는 아니다. 남성복/여성복 분리가 재생산하는 과거 질서의 강화에 대해 성별을 숨기는 오버사이즈 룩은 재생산을 멈추게 만들 수 있는 동력으로 제시되었다. 옳은 부분이 있지만 다는 아니다. 슬림핏 유행에 질려가는 걸 보면서 새로운 제품을 팔기 위해 패션 브랜드와 패션 매거진은 1990년대 스트리트 패션의 빅 사이즈 룩을 대안으로 밀어 붙였다. 옳은 부분이 있지만 다는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이유를 대는 건 편의적이다. 이걸 쓰는 사람의 목적에 부합한다. 몇 가지를 묶어 주장을 조금 더 강렬하게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여러 측면을 바라보는 건 쓸데가 있다. 위에서 잠깐 예를 든 세 가지 모두 나름의 이유가 분명하고, 정당성이 있고, 중요한 측면이 있다. 

이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사회의 경향을 패션이 증폭시키는 면이 더 흥미롭다. 트렌드의 힘, 멋지게 보이려는 사람들의 마음 덕분에 성역할은 더 강화되고, 과거 질서에 대한 항변도 강화되고, 마케팅의 힘도 강화된다. 말하자면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누구의 편도 될 수 있다는 거다. 무기를 든 사람이 누구인지, 그게 어떤 맥락 위에 위치하는 지 알아보는 게 더 중요한 일이 된다.

하지만 그러든 저러든 완전히 무의미하게 작동하기도 한다. 만든 사람이 무슨 의도가 있었는지 개의치 않을 수 있다는 게 패션의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부유를 즐기거나 무엇인가를 포착해 보고자 한다면 함께 부유를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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