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옷의 시대는 거의 끝이 났다

한때 럭셔리, 고급 제품의 상징이자 그 에센스는 잘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잘 만든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물론 그 격차가 완전히 줄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좀 있지만 적어도 생긴 면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 

짧은 수명이 문제라면 패스트 패션은 아예 그걸 여보란 듯이 안에 품은 채 나와버렸다. 게다가 사실 그렇게 수명이 짧은 것도 아니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수백 개의 부품이 들어간 고급 시계는 그만큼 정교하지만 떨어뜨리면 어디가 고장 날 지 모른다. 패스트 패션 의류의 얇은 두께는 낮은 질과 짧은 수명을 보여주지만 급상승하고 있는 기후 위기 속에서 조금 더 쾌적하게 보낼 수 있다는 부가적 효과도 있다. 즉 문제는 어디에 쓰는가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럭셔리 패션의 시대는 끝났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이제 고급 제품은 공산품을 어떻게 개별화시키느냐의 문제다. 로고와 프린트, 그외에 만족감을 주는 작은 차이들이 고급 제품의 가치와 가격을 끌어 올린다. 그리고 이 만족감은 대부분 마케팅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마케팅이 본진이다. 이건 부정적인 시각은 아니다. 럭셔리 패션은 언제나 마케팅이 본질이었다. 그걸 얼마나 그럴 듯 하게 해내느냐, 잘 하느냐 같은 게 판단의 근거가 된다.



또 하나는 패션 브랜드의 역할이다. 이들은 이제 자기 스타일의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하는 플랫폼의 역할을 한다. 비용을 지불하고 그 위에 올라타게 만드는 거다. 저 브랜드보다 이 브랜드가 잘 만들고 기술자가 많고 소재를 좋은 걸 쓰고 이런 것들의 의미는 감소한다. 누가 더 매력적인 세계관을 제시하느냐, 그리고 그런 세계관 위에 올라탈 수 있는 적절한 메뉴(옷과 신발, 인테리어와 소품들)를 제공하느냐다. 그러므로 고급 패션 브랜드가 내놓는 제품들은 예전처럼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라 그게 어떤 선상에 놓여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또 하나 그렇다면 잘 만든 옷이란 사라질 운명인건가의 문제가 있다. 물론 공산품 에어포스를 가죽 장인들이 다시 조립하는 거 같은 해프닝은 아무 의미도 없다. 지속 가능하지가 않다. 그렇지만 잘 만든 옷이라는 영역이 사라지진 않을 거다. 우선 이건 의류사 박물관 같은 데 남아있게 될 거라는 건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만드는 데 비용 차이가 너무 나고 그런 비용을 치룬 결과물이 그렇게 만족스럽지가 않다. 여기서 만족스럽지 않다는 건 감가상각의 속도를 말한다. 즉 더 나은 메이킹이 더 고급의 제품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 사실 이런 건 거의 20세기 초반 쯤까지 이야기고 그 이후 더 잘 만들었으니 더 고급이고 비싸다는 건 거의 마케팅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런 잘 만든 옷이라는 분야는 패션 안에서 별개의 카테고리로 남게 되었다. 90년대 복각 문화에서 출발한 일본과 미국의 웰메이드 구형 기능성 의류라는 장르는 폭을 넓혀가며 새로운 패션 장르가 되었다. 패션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고 이 커다란 시장에서 럭셔리 외의 분야도 충분히 자생이 가능하다. 굳이 저가 캐주얼을 따라하거나, 고급 럭셔리 브랜드를 따라가려 할 필요가 없다. 레이스를 만들고 비즈를 붙이던 장인들이 유니언 메이드 재봉틀을 다루고 캣츠아이 단추를 붙이는 장인들로 대체되고 있을 뿐이다. 

테일러드나 정장 셋업 같은 포멀 웨어와 비즈니스웨어 분야의 경우 상향 지향으로 럭셔리에 흡수되거나, 하향 지향으로 웰 메이드 빈티지 메이킹 분야로 흡수될 갈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착장 문화의 간소화에 따라 이쪽 지분이 작아지고 있기 때문에 자립이 점점 어려워질 거다. 그럼에도 이번에 나온 자라 50주년 턱시도 컬렉션 같은 걸 보면 알 수 있듯 패스트 패션이라는 경쟁자가 만만치는 않다. 보여지는 옷의 재미를 넘어서 잘 만든 옷의 재미, 착용감과 수명이 주는 재미를 알려주는 마케팅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다.

즉 잘 만든 옷 = 럭셔리의 시대가 끝이 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다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각자가 갈 길이 있고, 가만히 보면 다들 이미 그 길로 들어서 있다. 즉 길은 다양해졌고 문제는 대세를 얼마나 잘 따르냐 보다는 자기가 가는 길을 잘 가느냐 못가느냐 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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