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시대도 거의 끝이 났다

저번 부터 끝난 이야기를 계속 올리고 있다. 패션의 세계관과 세계의 패션관이 본격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발렌시아가가 피에르파올로 피촐리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임명했다. 케링이 CD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데

구찌 : 알레산드로 미켈레 -> 뎀나 바잘리아
발렌시아가 : 뎀나 바잘리아 -> 피에르파올로 피촐리
발렌티노 : 피에르파올로 피촐리 -> 알레산드로 미켈레

이런 식이다. 그 밥에 그 나물. 게다가 모두 백인 남성. 구찌는 텍사스 출신 디자이너 톰 포드의 기용, 무명의 알레산드로 미켈레 기용 같은 예외적인 선택으로 영광의 시대를 만들면서 구찌를 업그레이드 시켜왔다. 발렌시아가도 마찬가지다. 니콜라스 게스키에르, 알렉산더 왕 같은 이들을 CD로 선택했지만 발렌시아가 만의 뚜렷한 무언가를 만들지는 못했고(게스키에르 시절에 나온 모터백 같은 인기 아이템이 있긴 했다) 뎀나 시절에 와서 호와 불호가 갈리긴 하더라도 발렌시아가 만이 하고 있는 어떤 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가 10년 동안 역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거다.



아무튼 이 돌려막기는 케링이 과감한 의사결정을 망설이고, 보수적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가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건 뎀나가 구찌를 맡아서라기 보다는 무엇보다 개척이 중요한 고급 패션 시장에서 케링의 미래가 과연 제대로 흘러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구찌 같은 브랜드가 CD를 교체하면서 만들었던 큰 성공, 스타 디자이너나 그냥 정말 스타가 브랜드를 맡게 되면서 생기는 언론 보도와 관심의 집중은 다들 이 모델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CD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큰 힘을 실어주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결과가 좋으면 협업이니 캡슐이니 하는 업무 과중이고 결과가 나쁘면 그냥 교체된다. 교체 과정을 통해 언론의 포커스를 노리는 방식은 지금처럼 다들 거기에만 매달리는 시절에는 대체 누가 어디에 있다는 건지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성별과 인종 편향성이다. 소비자 층은 인종, 성별, 나라를 뛰어 넘으며 넓어지고 있는데 디올의 마리아 치우리, 루이 비통 남성복의 퍼렐 윌리엄스, 캘빈 클라인이 컬렉션 라인을 부활하면서 임명된 베로니카 레오니, 보테가 베네타를 맡은 루이스 트로터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유력 브랜드 대부분의 CD들이 백인 남성으로 채워져 있고 기차 놀이를 하고 있다. 

여기서 패션의 편협한 시각과 모순적 세계관이 반복된다. 이러는 와중에 럭셔리 산업에 마침내 축소의 시기가 찾아왔고 주요 브랜드의 매출 성장률은 지지부진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확대의 시기에 사람들이 얼마나 돈을 낼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하듯 가격을 올려댔지만 나오는 제품들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애초에 CD부터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 상황에 신박한 게 나올리가 없다. 그런 덕분에 지난 몇 시즌이 지나가는 동안 딱히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옷과 가방의 가격이 2배 이상 올라버린 상황이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거의 모든 브랜드들이 CD 교체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정 속에서 잠깐 생각할 여유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지금의 교체가 색다른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결국 CD를 중심으로 하는 현 패션 산업의 모델이 정말 지속이 가능한지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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